볼셰비키가 가졌던 이중성(인간 해방에 대한 약속과 공존하는 폭력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또한 초창기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제도적, 정치적, 경제적 근대화를 이루어내지 못했음을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러시아혁명은 내전의 혼란 중에 완수되는 과정에서 맑스주의의 ‘러시아화’를 낳았으며,
권력의 직접적인 경쟁자가 되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강서를 중심으로 한 중국공산당의 소비에트 정권은 남경의 국민당 정부에 있어서는 중국 통일의 최대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장개석은 국민당 내의 반장(反藏)세력을 제거한 후 1930년 말부터 1934년 10월까지 5차례에 걸친 군사적 포위 토벌
혁명 노선의 실패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되었고 결국 1935년 1월에 준의회의에서 소련의 지시를 받은 유학파 지도부의 잘못된 노선에 대해 강력한 비판이 있었다. 이 회의의 결과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창설 이래 처음으로 공산당을 통솔하게 되었다. 지도자가 된 모택동은 홍군의 임무가 단순한 전투가
년 2월 혁명을 계기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소비에트의 구성원들이 공장 및 군대의 막사에서 직접 선출된 그들의 대표라는 점에서 소비에트는 간접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근간이 된다.
이렇게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이중 권력’이 형성된다. 이 ‘이중 권력’은 러시아 사회에
, 이를 교육과 당의 선전활동을 통해 전파하였다. 그래서 여성은 사회적 노동을 통해 ‘후진적인’ 가부장적 가족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사적 영역(가족)에서의 남성에 대한 의존 상태에서 벗어나 공적 영역에서의 소련 국가의 ‘보호’ 대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