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를 위하여 어떠한 여지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봉건국가는 근대의 "일원적 평면지배국가"(Th. Mayer)에 대한 반대로 "개인결합국가"의 원형으로 나타났다.
지배기초로서 봉건제에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국가라는 의미에서 순수한 봉건국가는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고려되고 있
봉건제의 기본 성격을 그 상부구조인 군사제도나 법제도 또는 지방분권적 통치체제의 측면에서 파악하기보다는 이들의 하부구조로서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의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다.
봉건제의 개념에 대한 맑스주의적 해석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봉건제를 인류역사 발전의 한 단
봉건하여 서울의 울타리로 삼았다. 라는 대목이 있다. 이러한 중국의 용례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와 대비하여 앞선 두 주의 통치방식이 지방분권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음을 나타낸 말한다. 그러나 봉건제란 말은 주로 유럽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럽에서 봉건제나 봉건적이란
더욱더 희박해져 붕괴하고 말았다. 봉건제도는 프랑크 왕국이라는 공동의 모체에서 출발했는데도 프랑크 왕국의 해체 후 각국이 독자의 발전을 시작하자 지역에 따른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특색 있는 봉건체제를 나타냈다. 사회경제의 면에서는 공통점이 많지만, 국가체제의 면에서는 달랐다.
존재하지 않는, 아나르시가 지배하는 완전한 봉건정체가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립적 영주지배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중세의 묵은 지배구조가 이미 소멸되어 단순한 역사적 추억으로 되어 있던 절대왕정시대에, 절대주의의 이상인 통일적 주권적 국가의 반전상(反轉像)으로서 주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