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의 경우도 역시 융커 귀족과 결합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귀족 및 권위주의적 국가에 흡수된 형태였다. 반면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귀족과 투쟁하여 그들을 물리치고 부르주아지 중심의 사회를 건설하였다. 프랑스 대혁명이 부르주아지가 봉건귀족에 가한 최초의 가대한 타격이었다면 1830년 7월 혁
부르주아지로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계층이 포함되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농민이었다.
18세기 프랑스 농민은 동유럽의 농민들과는 달리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어 있었으며, 인클로저 운동으로 몰락한 영국의 농민들과는 달리 토지를 소유한 자작농이기도 했다.
지라도, 마르크스주의의 쇄신과 재구성에 관련하여 문제로 되는 것은 위의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을 넘어선다. 오히려 문제되는 것은 위의 사실을 재확인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다음의 두 개의 문제, 즉 (1) 계급적 관계, 계급모순, 계급투쟁의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수준들 간의 관계에 관련되는
지시켜주었다. 절대군주는 말그대로의 절대적 존재는 아니었다. 절대군주는 구체체의 불가분의 일부이었으며, 계서제의 정점에 위치해 특권층에게는 질서의 보증자이고 경제적 잉여의 전달자였다.
2) 특권사회- 절대권력을 위해선 군주는 영주의 권위와 성직자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켜야 했지만
프랑스가 경험한 격렬한 대혁명은 이후 세계 곳곳의 근대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으로서 복합혁명, 즉 귀족혁명, 부르주아혁명, 도시대중혁명, 농민혁명이 혼합된 성격을 지닌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시민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였고 경제적인 측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