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이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하다(신문왕 대)
모량리(혹은 정운촌이라고도 쓴다)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성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했다. 집이 군색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
보살입상과 귀면와(鬼面瓦)를 비롯한 신라 및 고려시대의 와당 등이 발견되었다.
이 절에는 775년(경덕왕 14)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미(强古乃未)가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만들었다는 약사여래동상이 있었다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원효(元曉)가 이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썼
원효(617~686) : 한국불교 최고의 고승. 한국의 불교를 정리하여 사상적으로 토착화시 켰으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끊임없이 염송하면 누구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고 하며,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ㆍ의상(625~702) : 최고 신분인 진골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
전기소설은 원래 7세기를 전후하여 당에서 발전한 소설양식으로 그 효시를 장작의「유선굴」로 본다. 나말여초의 전기소설의 한 편인「최치원」이「유선굴」을 패러디하고 있는 면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신라 문인들에게도 수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나말여초 전기소설이 당 전기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