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태조는 즉위 직후 무로마치 막부에 승각추를 보내 왜구의 금압, 붙잡혀간 조선인들의 송환을 요구하고 동시에 수호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족리의만은 사신을 보내 붙잡혀간 조선인 100명을 송환하면서 조선측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족리
조선정부의 대책을 살펴보고 조·일간의 외교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알아보도록 한다.
-본론
* 한반도에 모습을 들어 낸 왜구
왜구는 13-16세기에 걸쳐 중국 또는 조선의 연해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말이다. 왜구는 고려이전에도 존재하였지만 고려시대의 왜구는 고
조선의 흥망
* 청동기문화의 기반위에 성립 → B.C. 4세기 중국계 철기문화의 수입 → B.C. 3세기의 전성기 → 중국의 전국시대를 맞아 유이민의 유입 → 진․한교체기에 유이민의 유입 → 위만의 무리가 들어옴 → B.C. 194년 위만이 준왕을 쫓아내고 집권(위만조선) → 한과 남쪽의 진
교류를 갖기를 희구하고 있다. 이것은 『용담유사』를 위시한 바로 전대의 시가와는 다른 차원으로 외세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전환적 의미를 갖는다. 「동심가」1절에서 ‘만국이 회동하야 사회가 일가로다’라고 하였듯이, 사해일가론의 세계주의에 입각해서 국제간의 친선과 상호 이해를 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