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즉각적인 정체성 확립(identification)의 요소들’을 살펴볼 것 이다. 1933년 출판된 샤넬 카탈로그의 초판에서 칼 라거펠트는 ‘몇몇 그림들을 코코샤넬의 특별히 전문적인 운명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라고 말했다. 다섯 개의 삽화만으로, 라거펠트는 모자 제작가였던 가브리엘 샤넬이 커리
샤넬은 그 당시 대부분의 노동자 계급의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재봉사생활을 하기도 하였고, 카페 가수로서의 실패경력도 가지고 있었다. "올림피아나, 나나"처럼 그녀의 애치이었던 "코코"는 당시 고급 창부들이 흔히 쓰는 별명이었으며, 이미 시간제 창부였던 샤넬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아 부유한
코코샤넬은 오늘날 수많은 디자이너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③ 유일함
피카소는 그녀를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감각을 지닌 여성"이라 칭했다. 조지 버너드 쇼는 그녀를 두고 "세계 패션의 경이"라 말했다. 흉내낼 수 없는 개성을 지닌 여성 가브리엘 코코샤넬은 끊임없이 자신의 창조성을 개발하
, 또한 ‘명품= 졸품들의 사치품’식의 부정적 인식이 국내 패션・생활 산업의 보호막 역할을 했던 시대는 끝났고, 디자인과 품질, 마케팅에 이르는 수입 명품 브랜드의 치밀하고 체계적인 시장 전략과 높은 경쟁력이 국내 브랜드보다 수입 명품 브랜드의 확산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패션계의 과학자이자 혁명가인 셈이다.
샤넬은 패션계에 최초로 ‘토탈패션’의 개념을 도입했다. 옷에서 시작해, 메이크업에서 향수, 액세서리 등 여성패션의 모든 것을 브랜드화 하였고, 미국의 패션잡지 ‘보그’가 샤넬의 이러한 작업을 ‘토탈 룩’이라 표현하여 ‘토탈패션’의 어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