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 또 다른 침략인 것이다. 이러한 아전인수(我田引水)는 자기 논에 물 대기라는 뜻으로, 타인과 공정하게 이익을 배분하기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 선점하고 나서는 행위를 이르는 이기적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가까운 나라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얽힐 수 밖에 없는 한국과 일본
비문은 크게 4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문단은 전면의 제1행에서 제2행까지로서 사부지왕(실성왕)과 내지왕(눌지왕)이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소유를 인정하는 내용이다. 둘째 문단은 전면의 제3행에서 후면의 제1행까지로서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이하 중앙의 6부(六部)출신의
위시한 가야 제국이 언제부터 야마토왜와 정치적인 목적의 교섭을 갖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시사적인 내용이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인다. 이 비문에 의하면 400년과 404년에 왜가 한반도에 침입하여 고구려와 싸운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보아 야마토왜가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비문>에서는 신라를 다스리는 제왕이 천하의 중심을 장악하고 평화와 번영을 이룩한다는 세계관을 품격 높은 문장을 통해 볼 수 있다.
3. 국내외의 정치문서 (서간류)
삼국은 서로 긴밀한 관련을 맺고, 각기 중국 및 일본과의 교섭도 전개했다. 그렇게 하는 데 한문으로 된 국서가 반드시 필요했다.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