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의 일생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따스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6살 되던 해까지 체계적인 학문을 배울 수 없었던 그는 사촌 김윤제에 의해 발탁되었는데, 그 후 10여 년 동안 인간관계를 잘 다져간다. 이 가족의 이주야말로 정철에게는 대전환기를 맞는 기회가 된다. 그간 유배 생활로 잃었던 소년
여기에 든다
을 중심으로 한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을 짓기도 했다.
또한 송강정철은 본래 성질이 곧아서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시 조정의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즐겨 회자되고 있다.
40세인 1575년(선조 8)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43세 때 장악원정을 배수하고 조정에 나왔다. 이어 사간 · 집의 · 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송강은 호다. 돈영부 판관 유침의 아들로 어려서 인종의 귀인인 큰누이와 계림군 유의 부인인 둘째누이로 인해 궁중을 출입, 이후 명종이 된 경원 대군과 친숙하게 지냈다.
열 살 되던 해인 1545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큰형은 죽고 아버지는 유배를 당하였는데,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