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이 승하한 후 그의 계모인 趙大妃의 상복문제에 대한 `己亥禮訟`(1659)을 시작으로 `甲寅禮訟`(1674)을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은 喪禮를 중심으로 학문적 대결을 벌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 부침이 거듭되었다.
갈암의 정치적 활동은 이러한 당쟁과 연결되어 있다. 갑인예송의 승리로
조선시대를 살펴볼 수 있는 주 키워드는 정치사 이다. 정치사 안에 경제, 문화, 전쟁, 사상등 주요 쟁점들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조선의 당쟁, 붕당정치는 이미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다루어져 일반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이것은 조선의 멸망과도 결부되는 문제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송시열은 서인에서 비롯된 노론 계열이었다. 이들이 보인 학문적 대립은 인조 대를 시작으로 하여 효종 대를 거쳐 현종 대에 이르러 ‘예송논쟁’이라는 형태로 그 대립의 정점을 찍었다. 허목과 송시열의 라이벌 구도를 붕당정치와 예송논쟁을 통해 파악하고, 붕당정치가 그저 당파싸움에 불과한 것
문제들을 연결지어 본 결과 3가지 정도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직업교육의 천시, 유교권 국가의 교육과열, 창의성을 무시하는 교육이 유교의 사상에서 발생된 교육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우선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유교라는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유교의 발생과 우리나라에 유교가 들어온
바탕으로 삶을 이어왔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는 새로운 국토를 결정하는데 크게 고심하였다. 조선의 새 국토는 대전 근교의 계룡산과 지금 서울의 무악 등이 물망에 올랐다. 이 가운데 계룡산이 가장 유력하였다. 태조의 계룡산 정도는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계룡산은 풍수상의 신비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