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561년(왕 22)에는 <창녕비>(昌寧碑)를, 568년(왕 29)에는 <마운령비>(摩雲嶺碑)와 <황초령비>(黃草嶺碑)를 세웠으며, <북한산비>(北漢山碑)를 세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역시 그 무렵이 아닌가 한다. 이중 <마운령비문>에서는 신라를 다스리는 제왕이 천하의 중심을 장악하고 평화
순수하고 나서 군신이 모여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건립 연대는 568년(진흥왕 29년)이다.
비면에 새긴 글자는 모두 12행이며 한 행은 36자이다. 글자는 해서체이며 음각하였다.
황초령비는 그 발견과정에서 시련을 겪었는데 전란 중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문화의향기]1.아자방
한번 불을 때면 100일 동안 방안에 온기를 품고 있었다는 아자방(亞字房). 하동 칠불사의 선방 중 하나인 아자방은 처음 불을 지폈을 때나 100일 되 는 날에 다시 불을 넣을 때도 일정한 따스함을 간직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 가 전해져 온다. 아무리 두꺼운 구들을 깐 온돌방일지
순수(巡狩)하고 진흥왕척경비(眞興王拓境碑)를 세웠다.
그 뒤 565년에 하주가 합천으로 옮겨져 대야주(大耶州)로 됨으로써 이 곳은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火郡)이라 불리게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화왕군(火王郡)으로 다시 개칭되었고 현효현(玄驍縣)이 영현(領縣)으로 되었으니 지
순수비(巡狩碑)에 잘 나타나 있다. 한강유역의 확보는 중국과 직접 통화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으며 가야국의 정벌은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함으로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기틀이 된다.
신라의 이러한 대내외의 발전과 무열왕(武烈王) 김춘추의 탁월한 외교수단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