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천하를 통일하자 유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대박해(大迫害)를 받아 한때 소멸하는 것도 같았으나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유교는 국가적 교학이 되어 그 지위를 굳혔다. 공자를 존숭하고, 정치계급은 오경(五經:역경․서경․시경․예기R
천하에 넘쳐흐르는 것처럼 어지러운데 누가 이것을 바로 잡겠는가?” 하면서 이를 바로잡을 사람은 바로 그 자신임을 자임하고 있었다.
이처럼 공자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 상황은 전통의 존중에서 전통의 파괴로, 질서에서 혼란이라는 정치적ㆍ사회적ㆍ경제적 대변동이 일어난 그런 혼돈의 시대였
‘감시자’
⑦아동들은 성장하면서 중요한 타인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기대 사항들을 자신들의 인성 속에 점차적으로 통합해 나간다. 이러한 기대사항들이 개인의 도덕적 가치가 된다 : 가치를 내면화하면 외부로부터의 제재를 사용할 필요가 없고, 개인 내부의 ‘양심’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
대한 백성의 자발적 복종에 기반 하여 이루어지는 정치.
예치 : 예(禮)로써 백성들의 욕망의 한계를 설정하여 각자의 본분을 지키고 겸양을 발휘함으로써 사회적 안정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정치.
덕(德)과 예(禮)로써 질서정연하게 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지며 스스로 바르게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