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 조직과 본부에 대한 불신을 부르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로써 각 지회의 강령과 규약개정에 대한 요구가 뒤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반항적 기운을 선도하고 민족적 감정을 유발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런 개정안이 논의될 1928년 과 1929년의 정기대회를 금지시켰다. 1차정기대회
민족해방을 위하여 협동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좌파민족주의자들이 민족협동전선에 대해 공개적인 공감을 표명한 것은 1925년 1월부터였고 사회주의계는 1923년 이후 신간회가 창립될 때까지 민족협동전선론을 논의하였으며 그에 따른 조직적 결집을 실천하였다.
3) 조선민흥회
1926년 7월 8일 서울청
년대부터는 민족주의 세력 내부에서 ‘자치론’이 대두하여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
었다는 사실.
셋째,
국내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탄압과
특히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에 대한 몇 차례의 대대적 검거와 탄압을 주목할 필요.
신간회는 1920년대 후반의 위에 든
민족협동전선론과 정우회선언
신간회는 1927년 1월 「민족단일당」․「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아래 조직계획이 발표되고, 2월 15일 창립을 보게 되었다.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사회 양주의자가 제휴한 공동전선으로서 합법적인 결사운동(결사운동)이 비타협 투쟁을 감행하는 조선 민
대한 불만이었다고 파악했다. 이에 한국인들로 하여금 지방통치기관의 자문기구를 설치하여 참정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인 양 선전했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 및 자본가와 부유한 상인만이 선거권(選擧權)을 가질 수 있었고, 이들의 친일화를 꾀함으로써 민족분열을 가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