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악부〉·〈진중음〉 같은 풍유시와 〈한림제고〉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이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811년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Ⅰ. 중당
중당(中唐 766~835)은 안사(安史)의 난 이후의 약 70년 동안을 가리킨다. 당대는 경제적 번영은 최고조에 달하는 중국 역사상 전에 없는 번영을 누렸던 통일 왕조였지만, 755년 안록산과 사사명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부터 급작스럽게 망국의 길로 치닫게 된다. 안사의 난을 겪으면서 그 동안 중
-이백시의 복고적 경향-
이백은 촉의 선배인 진자앙(陳子昻)을 흠모하여 시의 풍격에 있어서 육조의 기려함을 제거하고 복고적인 문학을 계승하려 하였는데 그의 <古風> 59수는 바로 진자앙의 <感遇詩>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古風>시 첫머리 가운데서 “대아의 작품이 오랫동안 지어지지 않으니, 내
신악부사 11권)의 12종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이 중 고취곡사, 횡취곡사, 상화가사, 청상곡사, 잡곡가사를 문학사적 입장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데, 이는 이 중 그나마 한대 악부고사와 민가풍의 작품들이 가장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애제(哀帝, B.C.7~B.C.1 재위)가 악부를 태악(太樂)으로 통합하기까
신악부, 사)와 산문, 전기소설 등을 발전케 하였다. 또 학교 교육이 발달해 장안에는 국학(國學), 지방에는 부(府), 주(州), 현학(縣學)이 있었고, 사학(私學)도 성행하여 지식층의 확대를 통해 당대의 문화, 문학을 성행케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④각종 예술과 종교의 발전이다. 당대에는 음악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