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의 대표로 일컬어지는 정인보를 비롯하여 문일평, 손진태를 중심으로 그들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조사하였고, 그것을 통해 작게는 후기 문화사학, 크게는 후기 민족주의 사학이란 무엇인지, 과연 그것은 사학사적 입장에서 어떤 의의를 갖고 어떤 한계점이 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
공부를 오직 성찰과 확충에 두어 늘 고요함을 즐기고 움직임을 싫어함을 경계하였다.” 고 하여 선학과 양명학이 다름을 역설하고“선유는 궁리로서 격물치지하는 일이라 하여 지에 전속시켰지만 오직 왕양명만이 지행이 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하여 단지 격물과 궁리가 주자와 다름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는데, 양명연보(陽明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선생이 비로소 치양지의 교(敎)를 내어 걸었다"고 했다. 왕수인은 그해에 진구천(陳九川)에게 "양지 두 글자는 참으로 천고성현(千古聖賢)이 서로 전수한 한 점의
Ⅰ. 조선시대(조선)의 공예
조선시대의 공예는 간결·대담·소박한 특색을 보이면서 보다 대중화되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러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도자기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앞시대에 비해 낙후된 양상을 보였다. 이 시대 공예의 주류를 이루었던 도자기는 15, 16세기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가
공부, 즉 거경은 심이 발했을 때의 공부 즉 궁리의 전제이며, 그것은 쇄소, 응대, 진퇴와 같은 외재적 규율을 따름으로써 주체 의식을 확보한다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일상적 예 규범은 심설 논의를 통해 그 형이상학적 이론 근거를 갖게 되고 그 당위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