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주자학의 비교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토대가 되고 지대한 학문적 영향을 끼친 사조가 양명학이었던 것과 달리 유독 조선에서는 양명학이 기를 펴지 못했다. 그만큼 조선의 주자학적인 학문 풍토가 폐쇄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명학의 전래
헤이안 말엽부터 가마쿠라 초엽에 걸친 일본은 일본사상사에 있어 흔치않은 혼돈의 시대였다. 그 혼란의 주된 원인은 교토 조정의 힘이 쇠약해진 데 있었다. 일본 전국의 토지를 교토의 조정이 관리하는 중앙집권 국가체제는 신흥세력인 무사층이 각 지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됨으로써 완전히 붕괴되었
엄밀성만이 추구되었다. 이를 통해 중국의 주자학이 한국의 성리학으로 토착화되는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유학사상이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7. 이황과 이이의 비교 분석
1) 이황 李滉 [1501-1570]
조선시대의 학자·문신.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 시호는 문순(文
양명학
-중국 명나라 중기에 태어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이룩한 신유가철학(新儒家哲學).
중국 송나라 때 주자(朱子)에 의해 확립된 성리학(性理學)의 사상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이 주창한 학문이다. 성리학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육상산(陸象山)의 철학과 함께
천(天)
-의리천 : 보편적 자연법칙이자, 인간에 내재하는 ‘보편적 행위원칙’으로서의 도덕 법칙
∴ 공자의 천은 인간의 보편적 행위원칙의 기준이 되는 도덕의 기준이다.
-덕 : 천이 인간의 내면적 도덕률로 내재화된 것. 덕이란 천으로부터 부여받은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성.
∴ 인간이 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