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대외관계란 대체로 국가를 단위로 이루어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행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건국 이전의 고구려가 벌였던 부분적인 외교활동을 대외관계라는 용어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의 건국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은 일정한 정책적 차원하에서
영양왕은 수나라에 대해 적극적인 강경책을 채택한다. 고구려는 요서지방의 전진기지이자, 요충지인 영주지방을 영양왕 9년 2월 말갈인으로 구성된 기병 1만을 보내 선제공격을 가한다. 비록 수나라 영주자사 위충의 효과적인 방어에 의해 물러서고 말았지만 수나라 북방 전진기지에 큰 타격을 한다.
영양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598년(영양왕 9) 친히 말갈병(靺鞨兵) 1만여 기(騎)를 거느리고 랴오허강 서쪽의 요서(遼西)지방에 쳐들어가 양국은 첫 충돌을 하게 되었다.
이에 수의 문제(文帝)는 수륙군 30만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으나, 육상부대는 도중에 홍수를 만난 데다가 군량미의 수송이 여
영양왕 8년 수문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에 ‘항복하라’는 매우 모욕적인 국서를 보냈다. 이에 영양왕은 강이식을 병마원수로 삼아 전략요충지인 임유관(지금의 산해관)을 공격해 점령하고 요서까지 공격했다. 고구려의 유인 공격에 수문제가 30만 대군을 발진해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6월 장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