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서는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단순한 국가대 국가의 외교만을 다뤄서는 안 될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한 나라의 외교정책이 정해지는 데에는 그 나라의 발전상과 내부사정이라는 변수가 거의 필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에 고구려의 대중국과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있
고구려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고구려는 신흥 강국인 위나라와의 우호를 위하여 오왕(吳王) 손권(孫權)이 화친을 위하여 보낸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10年條.
또한 위나라의 공손연(公孫淵) 토벌에 군사를 지원하는 등 우호적인 외교정책을 펼
외교정책이 큰 무리가 없이 진행되어졌던 것은 대체로 미국의 외교적 정책목표와 한국의 외교적 정책 목표가 합치되는 편이었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외교적 마찰의 부분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었다.
1.2. 한국의 외교사
1.2.1. 광복 이전의 외교
1.2.1.1. 삼국시대의 외교
1.2.1.1.1. 고구려
삼국 중에서
외교적으로도 국제적 승인을 통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강온 양면의 외교정책을 적절히 구사하여 발해는 이미 고왕 대조영대에 이미 '내건국자호진국왕...진득부여 옥저 변한 조선 해북제국'({신당서}[발해전])한 것으로 보아 이미 상당한 세력 팽창을
대한 고구려의 대처방안도 새롭게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에서는 2세기에 걸친 혼란기를 통일한 수가 등장하였고, 나제동맹은 더욱 굳어져 더 이상의 적극적인 남진정책은 한계에 이르렀다. 내부적으로는 귀족간의 권력투쟁 속에 무력을 앞세운 연개소문이 정권을 찬탈함으로서, 국가정책이 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