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탕평은 외척 세력을 강화하는 역기능을 수반하여 새로운 부작용을 낳았다.
더욱이 영조는 의리문제를 당쟁 격화의 요인으로 여겨 그에 대한 논의 자체를 차단하려 했다. 신임의리와 임오의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영조의 이러한 입장을 완론 세력은 공감했지만, 준론 세력은 용인하지 않았
영조의 ‘임오화변’이다.
임오화변은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사건으로 그 내용뿐 아니라 방법까지도 흔하지 않기 때문에 많이 회자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런 만큼 최근에는 영화 <사도>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영화를 통해 일반적으로 임오화변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고정관념을 줄일
I. 훈구세력과 사림
1. 서론
16세기 사림정치가 시작되며 붕당정치가 판을 이루기 전에는 공신들과 왕족의 친인척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훈구세력이 득세를 하였다. 훈구세력의 특징은, 초기에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지으며 왕권강화에 도움을 주었고 중앙집권적 성격이지만 갈수록 권세가 심해져 점
Ⅰ. 들어가며
18세기가 한국사에 있어서 중세적 질서의 동요와 그에 대한 여러 방면에서의 대책과 수정이 모색되고 시행되던 변화의 시기였다고 함은 이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현상에 관한 연구는 주로 사회경제적인 면이나 실학 등의 사상적 측면에만 초점
영조시기의 蕩平정치는 시비논쟁의 조정이 주된 목표가 주어지고 군주의 지시를 잘 따르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주 원칙으로 하였는데, 정조의 탕평정치는 목표를 두고 실력을 원칙으로 하는 학문정치를 추구하였다. 탕평책은 영조가 추진해서 이루어놓은 것을 정조가 꽃을 피워놓은 것이라 본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