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활동에 관해서는 거의 외면하다시피 하여 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바로 이러한 문제재기에서 출발하여 18세기라는 1세기 동안의 정치사의 중심인 탕평책에 대하여 그것의 본질과 성격 등을 규명하고 나아가 이를 토대로 18세기 정치사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는 온건 소론과, 경종을 왕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던 강경 노론이었다.
노론의 세력이 주가 되었던 시기에 자신을 보호해줄 세력 없이 경종은 왕위에 등극했다. 그리고 곧 노론의 압력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고, 이듬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주청하는 노론의 요구에 이
탕평파를 육성하는 등 정권 안정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탕평의 원리에 의해 노론과 소론이 공존해 있었으나, 강력한 왕권에 의한 정쟁의 억제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가졌다. 토역 경과 사건과 나주 괘서사건 등의 이후 소론은 점차 약화되고, 특히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조숙하고 총명한데다
대리청정을 맡긴 후, 실수를 하면 구실삼아 세자를 교체하려는 것이 숙종의 본심이었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맡은 세자에게서 흠잡을 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병환과 소론의 강력한 반발로 세자 교체는 이뤄지지 않았다.
숙종이 승하하고 세자는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경종 즉위 후에도 노론
대표하는 인현황후)
☞ ↑ 위 내용 관련 자료「살아있는 한국사」. 이덕일. p.184~210
■ 경신환국 - 남인인 허적이 궁중의 기름천막을 쓴 것을 이유로 하여 남인을 축출, 서인등용 이때 남인의 처벌을 두고 남인을 처벌하려는 송시열의 노론과 남인과 화해하려는 윤중의 소론으로 나누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