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에 대한 억압이 강화되어 이른바 ‘제2의 농노제’가 시작되었다. 양 지역에서 서로 상이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농민의 단결력과 국가와 영주와의 관계, 그리고 도시의 발달 상태가 서로 상이했기 때문이었다. 동유럽의 농촌은 서유럽으로부터 식민된 비교적 자유로운 촌락들이 많아 영주계급과
영주의 세입을 거두었다. 영주지의 주인으로서 영주는 차지인들로부터 토지보유의 대가로 노동부역과 현물지대를 수취하였다. 촌락의 경작지 가운데 일부- 대개 1/3에서 1/2사이 -는 영주의 생계를 위해 할당되어 있었다. 직영지라 불리는 이 토지는 대개 지조로 이루어져 농민들의 지조와 섞여 있었다.
사회의 지배계급을 형성한다는 것, 기사로서의 군사 봉사와 하는 토지보유를 핵심적 의무 내용으로 하는 주종제가 지배계급내의 관계와 조직을 규정한다는 것, 대토지소유자들인 영주들에 의해 지방분권적으로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 봉건적 사회체제의 이데올로기로서 로마카톨릭적 그리스도교가
사회의 지배계급을 형성한다는 것, 기사로서의 군사 봉사와 하는 토지보유를 핵심적 의무 내용으로 하는 주종제가 지배계급내의 관계와 조직을 규정한다는 것, 대토지소유자들인 영주들에 의해 지방분권적으로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 봉건적 사회체제의 이데올로기로서 로마카톨릭적 그리스도교가
봉건적 농업 16, 17세기에 서유럽 여러 지역 농업의 화폐화를 나타내는 실질적인 지표는 아마도 우리가 종종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낮았을 것이다. 장 뫼브레는 16세기 프랑스에서 “농민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가내적 준자급체제 속에서 살았고” 동시에 “프티 부르주아를 포함한 장인들의 일상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