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맥족을 중국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箕子與箕子朝鮮硏究”의 결론은 기자조선이란 중국 최초의 속국이며 여기서 부여, 고구려도 기원한다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사 왜곡을 넘어 현재의 우리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유사시 북한에 대한 개입의 역사적 명분을 쌓는 작업의 일환일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평양성에서 일어난 검모잠은 신라로 간 안승을 맞아 왕으로 옹립한 뒤 한성(지금의 황해도 재령)을 근거지로 항쟁을 벌였다. 이어 요동지역의 안시성과 부여성에서도 반당투쟁이 발발했다. 이 무렵 신라는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는데, 그것은 당이 옛 백제
부여가 만약 중국의 역사라면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부여가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은 이미 중국의 역사기록에 의해 말도 안되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 부여 편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개본예맥지지, 이부여왕기
하되, 장기적, 포괄적, 국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고구려연구재단을 중심으로 한 남북한 및 국제학술 네트워크의 구축을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한국의 고대사 관련 연구만이 아니라 한․중 관계사 전반에 관한 연구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정치문제를 학술
때문에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을 것으로 주정된다.
『후한서 권 85 고구려』
"동이족들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인 까닭에 언어와 법제가 많이 같다고 한다."
『삼국지 권30 고구려』
"동이의 옛 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더불어 같다"
『후한서 권85 동옥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