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11년(1633년)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당시 과거시험관으로 우암의 답안 내용을 격찬했던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2년 후에 왕자의 사부로 임명되어서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가 30세 되던 해(1636년)에 병자호란이
송시열(1607-1689)은 선조 말부터 숙종 대까지의 같은 시기를 살았다. 그들이 산 17세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고 난 후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시기이다. 동시에 명의 멸망과 청의 등장이라는 동아시아적 대사건 속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어떻게 설명
송시열은 노인답지 않은 날카롭고 고집스러운 눈매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초상화의 작자는 송시열이란 한 인간이 그때까지 걸었던 고집스런 생애를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여 진다.
‘우암송시열’ 그는 조선시대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대(大)
인조 집권 시기에는 명분론은 주전론으로 형세론은 주화론으로 발전되어 그 대립은 더욱 심해지게 된다. 그 후 효종 집권시기에는 북벌론이 크게 대두되었고, 그와 대비되는 북학론도 나타나 미약하게나마 조선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1-2-1. 명분론
① 화이론
- 중화와 이적(오랑캐)의
자의 지적대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고관들이 자기 파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붕당을 만들고, 자기 붕당과 의견이나 이해(利害)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서로간에 붕당이라고 공격하며 죄인으로 몰아서 추방하거나 처형한 일이 종종 일어났다. 그러므로 송(宋)나라 때의 구양수(歐陽修)는 이러한 부정적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