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창령을 성당(盛唐)의 시단에서 주변적인 인물로 열거하고 있는데 문학사에서의 평가일 뿐, 정작 그 시대에서의 그의 시명은 아주 높았다. 그의 칠언절구는 특히 이름이 높아 당시의 악공(樂工)과 기녀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을 뿐 아니라 역대로 이백과 함께 칠언 절구의 대표 작가로 받들어졌고, “
이백 ․ 두보의 2대 시성을 비롯하여 시화일치의 묘미를 보여준 왕유, 전원과 자연을 읊은 맹호연, 정로이별을 읊은 고적 ․ 왕창령 등이 나오고, 중당기에는 백거이․ 원진, 만당기에는 두목(杜牧) ․ 이상은 ․ 온정균이 나왔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에는 2천 2백여 시인이 창작한 5
왕창령 등이 나오고, 중당기에는 백거이·원진, 만당기에는 두목(杜牧)·이상온·온정균이 나왔다.
Ⅱ.이 백(詩仙) (李白, 701-762)
1. 생애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
시의 골격으로 삼은 것은 시대의 흐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당나라의 모든 시인들의 전 작품을 수록한 것은 청(淸)나라의 강희제(康熙帝) 칙편(勅編)의 <전당시(全唐詩)>(900권)인데, 거기에는 대강 2,200명의 시 4만 8000여 수가 실려 있다.
당시는 일반적으로 초당(初唐)·성당(盛唐)·중당(中唐)·만당(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