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가작품연구] 규원, 이사, 옥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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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시가작품연구] 규원, 이사, 옥계원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왕창령 < 閨怨 >
Ⅰ. 작가소개
Ⅱ. 작품감상
Ⅲ. 작품해설
Ⅳ. 감상문

원 진 < 離思 >
Ⅰ. 작가소개
Ⅱ. 작품감상
Ⅲ. 작품해설
Ⅳ. 감상문

이 백 < 玉階怨 >
Ⅰ. 작가 소개
Ⅱ. 작품 감상
Ⅲ.작품해설
Ⅳ. 감상문
본문내용
왕창령 < 규원 >
Ⅰ. 작가소개

왕창령은 측천무후의 말기(698년)에 태어나 현종의 통치 기간이 끝난 직후, 즉 안녹산의 난이 발생한 직후(756년 혹은 757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자는 소백(少伯). 왕창령이 활동했던 태종 때부터 현종 때까지는 당나라의 황금기였다.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당나라는 축복 받은 왕조였다. 현종까지의 역대 군주는 모두 문학의 애호가였고, 문인이나 학사들과 어울려 자주 시를 주고받았다. 또한 과거 시험에서 가장 중시 받았던 진사과에서 시와 부를 짓는 재능으로 인재를 뽑았기 때문에 시를 짓는 능력은 출세와 직결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중국 문학사에서는 왕창령을 성당(盛唐)의 시단에서 주변적인 인물로 열거하고 있는데 문학사에서의 평가일 뿐, 정작 그 시대에서의 그의 시명은 아주 높았다. 그의 칠언절구는 특히 이름이 높아 당시의 악공(樂工)과 기녀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을 뿐 아니라 역대로 이백과 함께 칠언 절구의 대표 작가로 받들어졌고, “진나라 때의 밝은 달 한나라 때의 관문”(秦時明月漢時關)으로 시작되는 그의 는 명나라의 양신(楊愼)에 의하여 “신품(神品)”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왕창령은 일반적으로 변방의 정경을 잘 읊은 변새시(邊塞詩)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남긴 시의 수효는 181수에 달하는 만큼 ㄱ의 시세계는 생각보다 폭이 넓다.
‘변새시’의 대가로 알려진 그의 시에는 변방을 여행하거나 종군하면서 보고 겪은 감회와 풍경이 다양하게 반영되어 있고, 그 지역은 하남과 하북, 산서를 비롯한 동북방과 섬서와 청해 혹은 그보다 더 먼 서쪽에까지 이른다. 또한 그가 변방으로 나선 시기는 과거 시험에 급제하기 이전의 젊은 시절이다. 성당의 변새시는 그 시대의 활기차고 앙양된 시대 분위기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종군과 변방여행은 그 당시 거의 모든 시인의 시적 제재가 되었고, 변방은 청년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왕창령은 개원 11년(723, 26세)에는 지금의 산서성에 있는 병주와 노주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다가, 1차 여행을 마감하고 장안의 고향을 귀환하였다. 그리고 개원 12년 (724,27세)에 파상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벼슬길에 희망이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하서, 농우(지금의 감숙, 청해, 신강성 일대)쪽의 변방으로 달려가 출로를 찾으려 하였다. 그는 봄에 장안을 떠나 주지, 경주(섬서성), 소관, 그 인근의 백초원, 임조(감숙성)를 거쳐 옥문관을 나섰다. 대사막과 관련된 그의 변새시는 모두 이 시기에 자작되었다. 이러한 시의 내용은 크게 공을 세우려는 포부를 읊은 것, 병졸의 애환을 담은 것, 전쟁의 참담한 희생을 폭로한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변방을 출입하였지만 벼슬에의 길을 찾을 수 없었던 왕창령은 벼슬에 나아가는 가장 보편적인 길, 즉 과거 시험에서 그 출
참고문헌
① 오전루(2003)『중국시학의 이해』, 태학사
② 이병한(1998)『중국시와 시인』, 사람과 책
③ 이백(이원섭 역해)『이백시선』, 현암사
④ 이운일(19--)『왕창령侍注』, 상해고적출판사
⑤ 유성준(2003)『중국 성당시론』, 푸른사상

 ⑴ http://blog.naver.com/osj1952.do?
⑵ http://100.naver.com/100.php?where=100&id=744284
⑶ http://users.sinology.org/ohys/ws/wscpo4/swcprm04/wsrm0430b.htm
⑷ http://100.daum.net/DIC/detail?id=1707620&sname=%C0%CC%B9%E9
⑸ http://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C0%CC%B
9%E9&frm=t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