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때문에 조선사회는 땅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의 논리는 그만큼 조선시대 천하관의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서구식 세계지도가 본격적으로 소개, 보급되는 한편 18세기 중반경에는 지리정보에 대한 대내외적인 통제가 풀려나갔다.
조선에서 식량위기와 쌀값의 상승을 가져왔다. 1889년에는 삼남지방의 대가뭄에 대처하기 위해 함경도에서 防穀令이 내려졌다. 이것이 황해도 및 다른 지역으로까지 파급되자 일본은 무력을 동원하여 防穀令의 철폐와 방곡령 실시로 일본상인이 입은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일본
1840년경 일본도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 의해 남경조약이 맺어지고 문호가 개방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중국이 문호를 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역시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일본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유교주의 중화문화를 수용하여
조선왕조는 15세기 말엽에 건국한 이후 국가 사회의 안정을 기하고 민족 문화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비록, 임진왜란․병자호란 같은 두 차례의 큰 국난(國難)을 치르기도 하였으나, 전후 5백 년 동안 주권과 국토를 안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봉건사회는 17․18세기에 들어 점차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