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의 소재로 삼음으로써 경계로 삼고자 한 것이다.
❤ 용재총화의 일화는 한 인물에 대하여 선입관 없이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고 노력한 면을 볼 수 있으며, 다양한 인물의 특징 중 익살맞고 재치 있는 재담을 여러 편 선보이며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 얼마나 호응이 좋았는지를 짐작하게 해
1. 서론: 논의의 목적
성현의 『용재총화』는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하여 역사, 문화, 민속, 문학, 미술, 음악 등 여러 방면에서 연구할 수 있는 자료로써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수필 문학의 연구가 외면 받고 있는 만큼 『용재총화』의 연구도 외면 받고 있는 듯하다. 『용재총화』를 문화나 역
사대부가 집권층으로 성장한 데서 실질적인 변화의 양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대부는 신분적 특권보다 실력을 집권의 자격 요건으로 삼으며, 도의와 염치에 입각해서 민중을 다스리겠다고 했다. 지배세력이 지나친 횡포를 스스로 제약하는 것을 규범을 삼으며, 훈민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교화해서
하여 필기류 저작이 성행했다. 실천적 유학이 발달되면서 억제되었던 감정이 현학적 문학으로 표출되었으며, 홍문관을 중심으로 사대부 간의 교우관계가 확대되면서 서로간의 관심사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진 점 또한 이 시기에 이러한 저술이 집약적으로 나타나게 된 動因으로 제기된 바 있다.
I. 성균관의 역사와 기능
1. 성균관의 역사
(1) 성균관의 형성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에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개칭하면서부터이다. 충숙왕대인 1308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