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프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그 근처에 흐르고 있는 템스 강(혹자는 스위프트 강이라고도 한다.) 물에 던져 버려짐.
- 그는 성직 계층과 성례가 중시되던 사회에서 사도적 삶에 근거해서 인효론을 주
장하고 화체설을 비판했으며 성직자와 성례도 비판. 사효론은
위클리프(1320-1384)
‘개혁의 샛별’이니, ‘복음 박사’니, 또는 ‘옥스포드의 꽃’이니 하는 등의 명예로운 호칭이나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옥스포드 대학의 신학 교수 죤 위클리프는, 그의 찬란한 칭호들 만큼이나 영달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었다. 위클리프는 당시의 걸식수도사의 폐단을 공격하였
사람들은 아직도 생활의 터전을 땅위에 두었기에 기근이나 홍수로 인한 식량의 감소가 생기면 의식주조차 해결하지 못해 구걸하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독일의 영주들은 매년 군사를 동원하여 이 거지떼들을 자기의 영지에서 쫓아내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업무가 될 정도로 심각해졌다. 사람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며 늘 ‘신앙의 시련’에서 세상의 만 가지 현상을 새롭게 피어나게 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1483-1546)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16C 종교개혁의 핵심인물인 마틴 루터는 교회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유럽에 있어서 전환점을 가져다 준 사람이다. 그는 어떤 이들에게는 ‘이단의 괴
1. 마틴 루터의 생애
루터는 엄격한 부모에 의해 가톨릭신앙을 배우고, 마크데부르크와 아이제나흐에서 학교교육을 받았고 1505년 에르푸르트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법학부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 해 여행 중 갑작스런 벼락에 놀라, 죽음의 공포를 느껴 수도사가 될 것을 맹세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