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은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잊혀지고 말았다. 그의 이름과 학문 및 사상이 다시금 햇빛을 보게 된 것은 겨우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저자 미상’이었던 『우서』가 그의 저작임이 밝혀지면서 일약 유수원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는 실학자 가운데서도
유수원의 『우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담헌 홍대용의 『연기』, 박제가의 『북학의』 등이 있다.
3.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고증(考證)적 입장으로써 경서 및 금석․전고의 고증을 위주로 하였는데, 학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엄격하고 객관적인 태도로써 사실을 밝혀내는
실학사상의 농암 유수원
이용후생학파의 선구자 유수원(1694-1755)은 북학파의 선구자 역할, 상공업 진흥을 위한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화 전문화 실현과 상인 간의 합자를 통한 경영 규모의 확대 및 상인이 생산자를 고용하여 생산과 판매를 주관 할 것을 주장하였다. 자신의 저서 迂書(우서)에서 국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또한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의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앞서 언급한 이러한 북학파의 사상가들 중에서 초정 박제가와 연암 박지원의 경제사상을 알아보도록 한다.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북학파의 선구적 역할을 한 유수원은 우서에서 중국과 우리 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지나치게 농업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나라 살림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