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이다. 행동하는 지성의 시인, 비극적 초월과 초극 의지, 절명지의 꽃 등으로 불리어지는 시인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 세계는 오늘날 가장 고귀한 문학적 유산의 하나로 남아 있다.
억압의 현실, 민족 말살의 참담한 역사적 상황에 온몸을 던져 응전했던 인간의 모습이 이육사이다. 민족적 양심을
이육사는 생애를 통틀어 불과 36편의 시작밖에 남기지 않았다. 그것도 대여섯 편의 절창(絶唱)을 빼고는 대부분 태작(駄作)에 그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아마도 그가 천수를 누렸다면 더 많은 한국 문학사에 남을 만한 빼어난 작품들을 남겼을 것이다. 그가 죽고 난 이듬해 광복이 되었고,
작품인 〈파초〉를 상재할 때까지 이어진다. 1935년에는 민족주의자 위당 정인보 선생과 민세 안재홍 선생을 알게 되면서부터 《신조선지》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여기서 신석초와 친교를 맺는다. 육사가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게 된 잡지도 《신조선지》로, 여기에서 최초로 발표한 작품이 〈춘수삼
■이육사의 생애
호 육사(陸史), 본명은 이원록(源祿)이다.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安東)에서 출생하였다.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했고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귀국했으나
작품을 실으면서 필명으로 이활과 함께 `대구 264'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 264는 숫자에서 따온 것임은 쉽게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이 어떤 숫자인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다만 우리는 이 이름이 감옥에서의 수인번호 264를 따온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외에 어느 것에서도 숫자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