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가 정리되어『육사시집(陸史詩集)』이 서울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1968년에는 고향인 경북 안동의 낙동강 언저리에 이육사시비(詩碑)가 세워진다. 시비에는 생전의 행적과 시 「광야(曠)野)」가 새겨져 있다. 「광야(曠)野)」는 시인이 죽은 뒤 시인의 아우가 수습한 이육사의 절명시(絶命詩)다.
시인’ 또는 ‘민족시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물론 시를 통해서 저항을 했다기보다는 독립운동을 육체적으로 행한 사람들과 시 작품에서 내적으로 민족적 저항의식이 융화되어 나타내는 것과는 구별이 되어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절정」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거나 논평한
시가 발표되었다. 이 무렵에 쓴 시가 30여편 되는데 그 가운데서도「황혼」,「청포도」,「절정」,「광야」,「꽃」같은 작품은 名篇(명편)으로 우리 시사를 빛나게 해 주고 있다.
이러한 명성으로 이육사의 시는 윤동주의 시와 함께 우리 시사에서 민족이 시로 빛나고 있다. 그의 많지 않은 시 32편 (한시
광야를 새기고 있고, 뒷면에는 시인 조지훈이 육사를 추모하고 있다. 기록된 육사의 생애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은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것이 많다. 그 당시로서는 그의 활동을 정확하게 밝혀줄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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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2> 억압과 맞서는 정신의 절정7)
이 시의 첫 연은 암울한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친척인 이병희가 1944년 1월 16일에 사망신고를 하였다.
이육사는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