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발길을 내디딘 것은 1925년 말이었다. 그 계기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민족적인 집안 분위기와 일본 유학시절에 만난 아나키스트들을 통한 것이라 생각된다.김희곤, 『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지영사, 2000), p.69.
1927년 가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1년 7개월 간의 억
동안 실향의식에서 좋은 시를 썼다고 볼 수 있다.
2) 민족의식과 저항
육사가 젊은 날 뜻을 세워 활동한 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온몸을 던져 조국광복을 위한 활동이요, 또 다른 하나는 짧았지만 詩作활동이었다.
육사는 경술국치를 당하여 선조들의 투쟁정신을 이어
육사가 독립운동에 뜻을 세워 일제와 투쟁했던 것은 무엇보다 뚜렷한 민족주의사상과 정신적으로 강한 의지력 때문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어린 시절 모친의 정신교육이 컸던 것이다. 이런 투철한 정신이 결국 그를 행동의 애국자, 행동의 시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흔히 이육사 시하면 민족의 독
1944년 1월 16일에 사망신고를 하였다.
이육사는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이육사 사후에 안동시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