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시로서 다루되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관점. 기존의 이론적 체계 속에 갇혀 있는 이론으로서의 강단 비평과 개인에 인상에 의해 비평해야 한다는 인상비평에 반대한다. 뿐만 아니라 작품을 쓴 작가의 전기적 특성이나 작품의 시기적 특징 등 독자에게 심리적·정신적 영향
시세계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지 않고 30년대의 작품에만 한정시키는데서 오는 오류이다. 또한 지금까지 정지용의 시를 연구한 논문들은 형식을 분석하는 데만 치중한 나머지 정지용의 전기적고찰을 소홀히 하였으며, 이로 인해 정지용의 문학사적 위치에 대한 의문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정지용 시의
시절의 그 아름답던 풀피리 소리는 나지 않는다. 몸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진정으로 고향에 돌아온 것은 아니다. 그 고향은 이민족에게 빼앗긴 땅이기에. 정지용의 이러한 민족의식이 나타나 있는 일련의 시 경향을 김용직은 ‘소극적 저항'이라 불렀다. 이 소극적 저항의 경향은 그가 가톨릭의 세계에
시상의 흐름(짜임)
1연 : 청포도로 연상되는 고향의 모습(서곡)
2연 : 아름다운 공간으로 나타나는 고향
3연 : 아름다운 공간으로 나타나는 고향
4연 : 전설의 내용 - 희망이나 광복의 도래
5연 : 화자가 소망하는 세계(민족의 향연)
6연 : 미래에 대한 순결한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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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1920년에 동아일보사 정치부 기자로서 활약하였으며, 그의 문학은『폐허』의 동인으로 시작된다. 처음엔 평론가로 월평을 썼고, 김동인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1921년「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면서 작가적인 실력을 나타냈다. 그리고 1923년까지「암야」,「제야」,「해바라기」,「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