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첫 일간지인 ‘매일신문’의 창설하고 편집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매일신문은 독립신문과 더불어 비판적 논조로 정부를 견제하였으며, 일간신문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신문의 일간신문의 문을 열었다. 이정식, 이승만의 청년시절, 동아일보사, 2002. 57쪽
결국 자금조달의 문제로 매
이승만 공화국
당시의 국민은 “선별된 국민”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이승만정부와 정치적 이념을 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 이었다. 제헌국회의 당선을 살펴보면 이를 더욱더 알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선거로 기록된 제헌국회 총 선거는 미군정에 의하여 관리•집행된 가운데 국회의원
이범석의 퇴진은 이기붕을 등장시켰다.
․ 1954년 제3대 국회에서 1당 우위체제를 확보한 자유당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중임제한의 폐지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을 시도하였다.
․ 민주당은 1956년의 정․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대통령 후보인 신익회의 급서로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1) 4.19 혁명의 원인
4.19 혁명의 원인은 자유당이승만정권이 장기 집권을 하려고 이승만에게 엄청난 권력이 주어지는 대통령중심제를 실시하는가 하면, 3.15 부정선거를 일으킴으로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로 인해 총파업은 3월 18일 종식되었지만 미군정의 강경책이 지속되었고 분노를 느낀 도민들은 극우파의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면서 미군 축출, 경찰 타도 등을 외쳤다. 이에 미군정은 8.15를 기하여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여 모두 투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