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규보의 삶
1년 만에 복직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함
→ 완전히 삭탈관직, 귀양
→ 복직, 본격적인 문필활동(대부분의 외교 문서 작성)
→ 70세, 금자광록대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隨太保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禮部事 翰林
본관 황려(黃驪:驪興). 자 춘경(春卿). 호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초명 인저(仁氐). 시호 문순(文順).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다.
1207
비평문학은 우리 문학사에서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된다. <백운소설>은 <파한집>보다는 비평서로서 짜임새를 갖추지 못하였지만 시에서 ‘意’를 강조한 논의는 큰 의의를 갖는다. 이규보는 수사학적인 綴辭(철사)보다는 ‘設意’(설의)를 강조하였고 ‘意’를 ‘氣’로써 풀어나가려고 했다.
총 3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서 많은 부분 발췌했으며, 이규보 자작 시문에 대한 자평이 많이 실려 있다.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다른 사람의 시를 평한 것이다. 을지문덕이 지은 <與隋將于仲文詩>에서부터 신라 진덕여왕의 <太平詩>, 최치원·정
Ⅰ. 서론
고려시대는 한국문학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한시는 모든 體를 다 갖추어 화려한 꽃을 피웠다. 시화의 출현은 그 좋은 증거 중 하나이다. 시화는 시의 발달에서 연유하지만 시학에 이바지한 바가 큼도 사실이다. 고려시대의 시화는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 전개된 일이요, 후대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