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라남도의 영산강유역에는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다양한 유형의 특수토기가 계속적으로 조사되고 있다. 원통형의 특수토기는 1917년 나주 반남고분군의 신촌리 9호분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고(곡정1920), 1973년과 1980년에 그 구체적인 내용이 소개되었다. (혈택·마목 1973, 유광 198
다) 마한 사회의 지배 세력
마한의 정치적 성격을 생각할 때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마한을 구성한 기본단위는 소국이었다는 점이다. 이 소국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립 시기나 성립주체를 달리 하면서 각처에 산재하여 있었고 이들은 맹주세력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의 영향도 많이 받게 되었다. 고구려의 대외관계는 반도북쪽에 위치하여 중국대륙으로의 문호가 개방되어 접촉이 많았고, 고구려 의복문화가 자연스럽게 백제와 신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장에서는 상대시대와 통일신라, 조선시대에 쓰인 남자의 두식과 관모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하자.
출토되어 공예의 발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옹관에서 발견된 금동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었고 신라금관의 형식과 비슷하나 보다 고식으로 보인다. 그리고 근초고왕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칠지도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에 있는 것으로서 상감된 명문은 한일고대
옹관묘 또는 독무덤은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무덤쓰기의 한 방식으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옹관 또는 독널이란 일반적으로 사람의 시체 즉 주검이나 뼈를 묻은 토기를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크기가 크지 않았으므로 주로 어린아이의 주검을 묻는데 쓰였다. 옹관묘의 시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