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주의를 신흥국가의 국시로 만들겠다고 피력하였다. 이승만,『一民主義 槪述』, 일민주의보급회, 1946, 7~8쪽
일민주의는 그에게 있어 자신을 중심으로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이념 이였으며, 민주주의 그 이상의 가치였다. 그는 일민주의를 바탕으로 대한국민당, 자유당을 창당하고, 일민주의의 내
지주소작분쟁도 상당부분 해결
부정적 시각
1. 정부의 초기 경제 정책이 미흡했음.
미리 소식을 들었던 지주들은 토지를 빈농층에게 강매
이후 신흥지주계급으로 성장
2. 분배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웠음.
3. 원조물자로 인한 곡물 값 폭락 -> 영세농의 생활을 면할 수 없었음
당시 많은 정치 집단들은 그들이 지닌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우익세력과 좌익세력, 그리고 그 중간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는 중도파들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가. 우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조직기반
1945년 11월 말까지 이승만과 임정세력이 귀국함에 따라 국내의 한민당과 함께 3대 우익세력이 정
당시 많은 정치 집단들은 그들이 지닌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우익세력과 좌익세력, 그리고 그 중간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는 중도파들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가. 우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조직기반
1945년 11월 말까지 이승만과 임정세력이 귀국함에 따라 국내의 한민당과 함께 3대 우익세력이 정
이승만 정권은 전쟁이라는 국가의 위기 중에도 정권의 연장을 위한 독선적인 정국운영을 일삼음으로써, 그 후에 나타날 장기집권 체제의 씨앗을 뿌렸으며 정치를 파행으로 몰고 갔다. 1952년의 부산 정치파동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확보함으로써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이승만은 그 후 자유당을 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