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 한독당은 임정법통론에 끝까지 매달리면서 비상국민회의(1946.2.1), 국민의회(1947.2.14) 등을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남한 정국을 풀어가려 했다. 한편 이승만, 한민당 세력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1945.10.23), 민족통일총본부(1924.6.29), 한국민족대표자회의(1947.7.10)등을 조직하여 정국에 대응했다.
이승만과 임정세력이 귀국함에 따라 국내의 한민당과 함께 3대 우익세력이 정립되었다. 이들은 반공, 반소, 반탁의 입장에서 완전히 동일했으나 3자는 내부적으로 많은 상호견제와 갈등을 지니고 있었다. 이승만은 자신을 중심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구상을 능란하게 펼쳐 갔고, 한민당은 미군정
교포세력이 그가 가진 주도적인 세력이었다. 이러한 요소는 해방 후 초반 국내에서의 그의 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고,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외교적 노력을 통한 독립론은 상대적으로 투쟁을 바탕으로 하고있는 좌파 운동가들에 비해 민중의 공감을 얻기에 부족했다.
세력 귀국 : 개인자격. 1945년 11월.
- 한독당(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법통론 주장.
▶ 중도세력(중도우파) : 안재홍, 김규식등. 양심적 우익민족주의 세력.
▶ 좌익세력 : 당 재건. 1945년 9월 박헌영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창당.
-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 완전한 독립과 토지문제 해결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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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령을 몇 개 번역하여 다듬고 향후 정치체제의 변화에 조응할 수 있도록 형식적으로 일부 수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처음으로 법률적 형태로 공무원에 대한 근거 규정을 마련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인사담당기구로 고시위원회와 총무처 인사국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