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건당이 봉기한다. 이 홍건적은 1359년 12월 고려에 밀려들기도 했다.
이 때 공민왕은 안동으로 파천하면서 개경이 함락되기도 한다. 홍건적이 지배한 두달동안 공민왕은 전국적으로 약 20만의 군을 모집해 개경 탈환작전에 나선다. 고려의 대군이 개경을 에워싸자 홍건적은 요동으로 달아났다.
Ⅰ. 서언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에 대한 우리나라의 연구는 상당히 소홀하다. 개설서나 교과서에도 사실을 중심으로 간단히 다루고 있는 정도이다. 그 이유는 일본정벌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전쟁이며, 원의 식민지 간섭을 받았던 고려가 불가피하게 전쟁에 동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경
정벌을 재개한 쿠빌라이는 1279년 긴 전쟁 끝에 넓고 비옥한 남송의 토지를 복속시켰다.
(2) 남송 정벌
대칸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 앞에 가로놓인 문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송과 체결한 조약을 이행토록 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위해 쿠빌라이는 학경(郝經)을 송에 파견하여 즉위를 알리는 동시에
Ⅰ.서론
일본과 우리나라는 많은 애증의 관계 속에서 살아왔다. 역사상 일본은 우리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는데 그 중에서도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왜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그 실태와 원인, 목적, 그리고 당시 조정의 대책 등을 알아보고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일본원정을 시행한 것이 아니라 元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해서 진행된 점이 이 사건을 元의 일본원정이라고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본 주제에 대한 연구논문과 관련서적도 ‘몽고의 일본원정’보다는 ‘여원(麗元)연합군의 일본정벌(征伐)’이라는 제목을 붙인 글이 대다수였다. 그러므로 본 발표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