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그 기능은 매우 제한적이기는 하나 정부형태를 계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는데, 1945년 10월 시데하라 내각은 ‘전쟁책임에 관한 건’에서 천황에게 책임이 없음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첫째, ‘대동아전쟁’은 제국이 사위의 정세를 감안하여 어쩔 수 없이 나섰다. 둘째, 천황은 어디까지
가해오던 때이기 때문에 그다지 큰 실효성을 거두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이후로 친위연대는 별다른 병화가 없이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규모면에서 양적으로 확대되고 질적으로 정예화 되면서 편제상으로 4천여 명 병력을 유지함으로써 시위대와 함께 중앙군의 부력부대가 외었다.
대한제국의 역사는 일본의 제국주의 통치 속에 국권과 인권을 모두 빼앗긴 채로 신음하고 있었다.
100년 전 그 시기에 영국 출신의 기자 F.A.매켄지는 러일전쟁 종군기자로 방한한 것을 계기로 한국을 주목하고, 한국의 국권 수호운동과 독립운동을 음양으로 지원한 사람이다. 제국주의 우방으로서 일
대한제국은 의화단 사건이후 러시아가 대군을 파견하여 만주를 점령하는 한편, 러․청밀약을 체결하여 만주를 지배하려하자 러시아의 남진을 한층 더 경계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러시아 경계론을 러일전쟁 직전까지 대외인식의 한 축을 형성했고, 결과적으로 ‘한국 보호국화’를 획책한 일본에
일본의 문명개화사상(文明開化思想), 그 중에서 특히 후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화파는 고종의 개명화 에 노력하며서 여러가지 개혁사업을 벌이는데, 그것이 결국 개화파 주도 및 방식에 의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으 로, 기존 집권층의 반발을 받았다.
더구나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구군인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