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의 적응은 서양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와 구별되는 고유한 것의 강조로 나타났다. 전자가 기능을 강조한 정치 제도에서 주로 나타난 반면, 후자는 국가의 혼이라는 문화적인 분야에서 주를 이루었다. 서양과 일본을 동시에 끌어안으려는 이러한 시도는 모순을 낳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자발
일본이 아니다!---주시한 그의 안목이 날카롭다.
동양문화를 신비화시키는 짓을 ‘근대인의 일종의 자포자기’ 또는 ‘근대문명의 말기 현상’으로 파악한 것은 평론가 김기림(1908-?)이었다. 근대문화가 모순 상극의 절정에 직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양문화의 파탄을 말한다면 ‘문화적 감상주의’
산업 혁명을 일으킨 국가이긴 했지만 동유럽 국가를 제외한 여러 유럽 국가들은 경제적 수준과 기술 수준이 비슷비슷했기 때문에 서로의 힘을 모아 협력체를 빠르고 지속적으로 형성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국가간 다자협력체에 있어서 성공적인 모델로 꼽히고 있는 EU의 형성은 서유럽 국
대한 전승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인데, 적어도 13세기에는 단군이 개국의 시조로서 널리 인식되고 있었던 셈이다.
4) 동아시아국가별 신화 기록 양상과 의미
일본에서는 신화가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은 분산되어 산재하였다. 그리고 신화가 기록되는 시점은
아시아의 국가들은 서구에 비해 더딘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책임을 유교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중국에서의 공가점 타도와 전반서화론, 그리고 한국에서의 유교망국론 등은 이러한 경향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동양에 비하여 서구의 문화와 경제가 발전된 양식이며 저개발국가의 문화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