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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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동화주의
1910년 병합 이후, 식민지조선을 대상으로 표방된 동화주의는 한편에서의 무단권력과 함께 식미지조선인에게 일선동화에 대한 동의를 유도해 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동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일제는 이론
작위를 잃는다. 조희연은 사후에 남작을 반납했다. 윤웅렬의 남작은 장남 윤치로가 상속했으나, 총독 암살 음모라는 날조된 죄-105인 사건-를 덮어씀으로써 1913년 10월에 박탈을 당한다. 남은 59석이 대체로 무사하게 일제 말엽까지 물려졌는데, 내역은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17명, 남작 33명이다.
체제와 같은 극빈 열악한 비인간적인 상태였다.' '한국인은 그대로 일본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보다 합병을 해서 세계 1등 국민으로서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100만 명이 넘는 일진회가 합방을 요청해 정치적 운동을 전개했고, 그것은 거대한 운동이었다.'고 주장하였다.
. 토지조사사업은 1912년 8월 토지조사령, 1914년 지세령을 거처 1918년 10월까지 약 8년 8개월 동안에 걸쳐 실시됐다. 이 조사로 조선농민들은 토지 소유권은 물론이고 경작권, 개관권, 도지권을 잃었고, 수많은 국유지가 조선총독부 소유로 바뀌어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지주에게 넘어갔다.
식민지화하였다. 그리고 일제치하 30년간 조선은 수탈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처음 10년간은 칼을 앞세워 조선인들을 무력으로 탄압하던 시기였다. 태형령이라던지 즉결처분권 등을 앞세워 조선인들에게 강제적인 굴복을 요구하였고, 토지 조사령과 산미증식계획 등을 통해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