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적 모든 요소들이 변화를 거듭하는 역학적 관계 속에서 의식 있는 선비들의 각성과 현실 비판이 새로운 사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이 시대적 문제에 스스로 뛰어들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고 그 해결방법을 모색한 개혁사상가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문학, 철학, 경제, 사회
성리학이 조선사회에 뿌리내리면서 선비의식은 사대부들의 규범으로 정착되고, 성리학적 교육의 과제는 선비의식의 함양과 그 실천으로 귀착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여겨지는 퇴계 이황이 주목할 만한 교육사상가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황의 교육사상은 성리학적 교육
성리학에 비해서 어느 방향으로 변질되었으며, 그러한 변질이 조선후기와 어떻게 어긋나게 되었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는 것이 이번 발표부분의 핵심이다.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시킨 신진 사대부 계층에 의해 건국이념으로 채택되었던 성리학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사상적 기반으로
사상적 요소들이 정리되어 실학파의 학파적 성립을 보게 된다. 성호 이익을 중심(大宗)으로 하고 권철신 · 이가환 · 안정복 등이 주축이 되어 제도개혁론을 주장하는 18세기 전반의 성호학파와 청나라의 문화와 청에 들어와 있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이자는 담헌 홍대용(1731-1791) · 연암
/구암과 효종 때 주전의 필요성과 대동법의 실시를 주장한 김육을 들 수 있다. 실학이 학문적 체계를 이루게 된것은 유형원/번계에 이르러서이고,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 이익/성호과 박지원/연암에 의해서이며, 실학사상은 19세기 초기 정약용/다산에 의해서 집대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