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반드시 제주인이 자립하여야 잘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신념하에서 관리들과 서로 계를 조직하여 친목을 도모하고, 한편으로는 비밀히 많은 사람들을 규합하고 역사를 모집하며 병기를 제조하는 등의 준비를 갖추어 목사와 판관 및 정의현과 대정현의 양 현감을 죽이고 전도를 점령하여 해
대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주민중은 어떠한 중앙정부의 착취에도 외세의 침탈에도 전통적으로 부단히 저항하여 왔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하에서도 이어졌다. 일제가 식민지 경제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조사사업(1912~1918)의 결과,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잃게 되었다.
제주도(제주특별자치도)의 일제강점기
◆중앙 : 1921.1.27. M..L사상단체「서울청년회 결성」
제주도 조천 출신 기명식(와세다 졸)이 참여 중앙집행위원이 됨.
○제주 : 1921.4 M..L사상단체「반역자 구락부 결성」
당시 서울에 유학중이던 김택수(제주읍), 김민화(조천), 홍양명(제주읍), 한상호(제주읍),
43항쟁(제주 43사건)의 정의
‘4.3’이란 제주도에서 5백여 명 미만의 무장자위대가 군정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세력에게 무력 행동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이 때 무장대는 남한만의 단선.단정 저지를 통한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 친일 경력의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추방을 요구
제주도좌익세력발전과 자주교육운동해방공간의 제주의 상황은 대체로 다른 지역의 상황과 비슷하나, 인구이동이 현저히 많았고 자영농이 상당히 증가해 토지문제보다는 농민운동 · 곡물수집문제 등 민중 생존문제 등이 더 시급했다는 게 특징이다. 그 대략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