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은 국내 정치 세력과 미군정이 공동으로 저지른 사건이다. 이 점은 당시 제주주둔 9연대장 김익렬 장군의 회고록을 통해 알아 볼 수 있다. 미군정이 말하는 공산 반란론은 전략적인 이유로 조작된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즉 그는 "미국 본토로부터 제주도사태 발생에 대한 문책을 받은 미
년 1월 국무회의에서 ‘제주도사태를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제주도민들을 공산주의자로 여겼다. 이 때문에 무차별적인 인명살상이 빚어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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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요인
1. 좌익의 결성과 활동
해방 직후 전국적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이를 기정사실화 하여 미군을 맞으려고 한다. 그러나 9월 8일 한반도로 진주한 미군은 9월 2일 하지의 포고문과 9월 9일 맥아더의 포고 제1호에서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의 존속을 발표하였다.
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가 결정되
제주도의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제주도와 한반도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가장 이슈화되고 있는 민중 이데올로기적 부분에 있어 접근하기로 하였다. 실제로 4.3 사건을 주도, 지휘했던 세력은 제주 남로당이었다. 분명 당의 성격에 비추어본다면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섰으나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다스리기보다 남로당의 선동을 분쇄하는 데만 주력했다. (2) 전개 과정
미군정에 의해 동원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은 3·10 총파업 이후 이듬해 4·3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파업 주모자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