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으로 좌절하고 있었다. 전리품의 배분에 있어서 푸대접을 받았을 분만 아니라, 확장된 영토에 있어서도 그것은 대다수 이탈리아 국민들이 원하는 바의 결과는 아니었다.
대전에서 이탈리아는 60만이라는 엄청난 전사자를 내었으며, 원래 기초가 약했던 자본주의 경제도 크게 파괴되었다. 군수공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조약은 3대국인 미국·영국·프랑스의 이익과 타협의 산물이었으므로 이에 강한 불만을 품은 전승국인 이탈리아·일본도 수정을 요구하였다. 베르사유회의에서 독일에 대한 강경책을 추구한 프랑스는 23년 초 배상금 인도지연을 들어 독일경제의 심장부 루르지방을 점령하였다.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 측의 군비강화가 14년 여름에 그 절정에 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5년 또는 16년이었음으로, 따라서 지금이
국제 질서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당시 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이·일에 대한 유화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결과적으로 이들 국가의 팽창정책을 부추겼는지 살펴보자.
다섯째, 앞에 제시한 네 가지 요소를 고려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이후 전쟁을 막기 위해 형성된 베르사이유 체제
조약 폐기로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오.헝의 중재로 타협안이 마련되어 최종 의정서가 채택되었다. 이는 결국 프랑스의 특수이익이 모두 국제적으로 승인 받은 것이었고, 독일이 영.프 협상을 붕괴시키기 위해 모로코 문제를 일으킨 목적과는 반대로 영.프 협상을 강화시키게 되고 결국 독일은 고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