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정부는 상소하는 신도들을 안심시켜 집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태도를 바꾸어 금령을 내렸다. 결국 힘으로 정부를 공격하여 새혁 투쟁을 전개하려는 성급한 신도들이 늘어만 갔다. 결국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
조병식과 보부상의 두목들도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이것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조치에 불과했다. 일본과 러시아 등의 외세를 등에 업은 수구파들은 역습했다. 드디어 1898년 12월 25일 군대를 동원한 가운데 고종은 칙어를 내려 만민공동회를 단죄하고 해산시켜 버렸다. 그러난 만민공동회를 통해
조병식과 보부상의 두목들도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이것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조치에 불과했다. 일본과 러시아 등의 외세를 등에 업은 수구파들은 역습했다. 드디어 1898년 12월 25일 군대를 동원한 가운데 고종은 칙어를 내려 만민공동회를 단죄하고 해산시켜 버렸다. 그러난 만민공동회를 통해
상소 중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조병갑은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한다.
동학운동의 배경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에 자주 독립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한 일본이 수구파에 가담,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도록 권고하고 이를 고종이 받아들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함으로써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싸움은 수구파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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