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과 동학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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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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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월 최시형과 동학 변천사
해월 최시형의 생애
해월 최시형의 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천도교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 되었는가?
◈ 들어가는 말
동학은 한울에 대한 공경인 경천과 시천주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내 몸에 천주(한울님)를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구제의 신앙이었다. 이 신앙은 제 2대교주인 해월 최시형에 이르러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事人如天)’는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되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의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한울에 내재한 것으로 보는 사상으로 널리 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또한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는 더 나아가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을 동학의 주 사상으로 삼았다. 우리는 발제를 통하여 특별히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생애를 살펴보고 해월의 사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동학이 민중과 더불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 해월 최시형의 생애와 사상
1. 생애
최시형은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이다. 5세에 어머니를 잃고 12세에 아버지마저 여의고 난 뒤에는 남의 집에서 일하여 주고 자랐다. 17세를 전후로 조지소에서 일하게 되었고 19세 때에는 부인을 맞아 가정을 이루었다. 28세 때에는 그가 살던 방내주민들의 뜻에 따라 그 방의 집망이 되어 6년간 그 소임을 수행하였다. 고아가 되어 떠돌아다니던 신세에서 이 정도의 자립과 중망을 얻었다는 것은 그의 근면성과 성실성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1861년(철종 12) 35세 때 수운이 동학을 처음으로 펴기 시작한 때 동학을 믿기 시작했다. 그는 스승을 한달에 세 번 혹은 네 번씩 어기지 않고 찾아갔다. 스승을 뵙고 그 설교를 듣는 동시에 그 예절을 배웠다. 집에 돌아가면 배운 것을 익히고 생각하는데 여념이 없었으며,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찬문에 목욕을 해 가면서 정진하였고, 스승을 충심으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1863년 동학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제2세 교주가 되었다. 1864년(고종 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 ·울진(蔚珍) 등지에서 포덕(布德)에 힘썼다. 그는 경상도 영양군 일월산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용화동을 동학 재건의 거점으로 선정하고 이곳에서 각지에 몰래 사람들을 파견하여 신도들의 믿음을 고취하고 1년에 4회씩 정기적으로 ‘49일 기도’를 하게 했다. 또 그동안 관헌에 몰수되고 혹은 소각되어 없어진 동학의 경전을 다시 필사시켰으며, 스승을 추모하는 뜻에서 계를 조직해 교인으로서 계원이 된 사람을 1년에 두어 번 일정한 금액을 내어 그 돈으로 스승의 제사 비용을 마련했다. 이리하여 명맥이 거의 끊어져 가던 동학이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동학의 이러한 부흥은 해월의 깊은 신앙심도 있었지만 정부가 국내의 사정으로 인해 동학에 대해서 철저히 탄압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원군 집권 말기인 1871년 3월 10일에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신했다. 이 민란으로 동학은 더욱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었고 해월의 신변을 더 위험해졌다. 그는 수사망을 피해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풀뿌리 나무질로 겨우 연명하다가 뜻밖에 나무꾼을 만나 영월군 직곡리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해월은 이 집 주인을 입교시켜 독실한 신앙 가정으로 만들었다. 이 곳을 발판으로 하여 ‘49일 기도’특별 기도식을 드리는 한편 각지의 신도들을 모아 설교도 하고 토론도 하여 교리를 밝혔다.
그 후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經典)을 발간,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 조직을 강화했다. 18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덕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정부는 상소하는 신도들을 안심시켜 집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태도를 바꾸어 금령을 내렸다. 결국 힘으로 정부를 공격하여 새혁 투쟁을 전개하려는 성급한 신도들이 늘어만 갔다. 결국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해월은 무력에 의한 투쟁을 처음엔 반대하다가 이 투쟁이 의외로 커가고 승리를 거듭하자 다른 신도들도 동조하자 결국 해월도 신도들의 뜻을 받아들여 4월2일이 신도들을 충청도 청산에 모이게 하였다. 이 해 9월 전라도에서 봉기가 다시 일어났으나 관군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이 해 12월경에 진압되었다. 그 뒤에 해월은 다시 지하 포교에 마지막 힘을 다하다가 1896년 5월25일 관헌에 잡히고 말았다. 옥중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1898년 7월18일 교수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9년 뒤인 1907년 7월에 내각총리대신과 법무대신의 이름으로 무죄임이 판정되었다. 해월은 동학에 투신한 지 37년만에 동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셈이다. 이 때 나이72세였다.
2. 해월 최시형
(1) 해월의 사상
해월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제자들이 남겨놓은 기록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활동기간이 길었고 활동무대가 넓었으므로 다양한 제자가 있었다. 그러나 기록들을 통해 해월의 사상을 추려낼 수 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해월의 이름으로 교인들에게 또는 관헌에게 전달된 그들이 있다. 이러한 글들은 자연히 그 분량이 제한, 실제적인 목적에 관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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