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로 구상되는 공산주의자 그룹을 당 재건의 매개 조직으로 할 것.
당 재건의 토대가 확립되었을 때 코민테른이 파견한 전권 위원의 주도 아래 그룹 대표자 회의를 열어 당을 재건할 것.
9월 8일 당 결성 위한 열성자 대회 개최
열성자 대회 이후 박헌영의 주도권 장악 후 조선공산당 중앙 재건
조선공산당으로 승인받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홍명희, 김찬 등은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여 강습회와 토론회를 열고 책과 잡지를 펴냈다. 이들은 1923년 5월 꼬르뷰로(고려국) 국내부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신사상연구회는 1924년 11월 화요회로 이름을 바꾸고 행동단체로
조선의 대중들에게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했으며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넷째, 일제의 식민통치방식이 사회주의이념의 수용·확산을 원조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탄압 일변도의 무단통치만이 효과적인 식민통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문화통치를 내걸었다. 이러한 문화통치는 본질적
활동하고 있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자질이 뛰어나고, 이들이 장차 귀국한 뒤 수행할 잠재능력이 크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이후 그는 이들을 포섭하여 중공당의 세력범위로 이동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해방 직전 중국공산당의 한국문제에 대한 구상은 1945년 8월 11일 팔로군 총사령 주덕이 조
1. 머리말
조선공산당은 1928년 7월부터 10월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일제의 검거로 조직이 와해되었고 코민테른의 <12월테제>의 지침에 따라 노동자와 빈농에 기초한 당 재건운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당 재건운동에 앞장서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당시 일본과 우리나라 반공체제에 탄압을 받으면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