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으키지는 못하였으나, 많은 지식인에게 전통적인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또 조선 후기의 개화사상(開化思想)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과정, 그리고 그들이 받았던 박해와 그 영향들을 살펴보자.
2. 서학(천주교)의 수용
조선의 지식인들이 천주교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중국 북경에서의 일이고, 천주교서를 연구하게 되는 것은 실학의식을 지녔던 유교지식인들에 의해서였다. 북경에서 천주신앙과 처음 만나고 중국의 예수회 서양성직자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이른바「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서양 중세의 Schola학문
천주교의 내용은 배격하자는 입장. 두 번째로 서구 학문적인 내용을 받아들이고,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관심을 보이는 입장. 세 번째로, 천주교를 적극 수용하여 신앙화에 이르는 흐름이다.
2. 개화기 이후의 서구문물의 유입
가. 시대적 요인
구한말 조선의 사회는 서구 강대국들의 지속적인
조선의 외교사절은 시대 추이에 따라 서양문물을 조선에 소개하고 동시에 서양화를 유입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되었을 때(1783) 종교실천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벽의 간곡한 부탁으로 북경의 그라몽 신부로부터 입교절차를 받고 천주실의 십자가 성화 등을 받아와서 이벽에
조선 초기에는 강력한 왕권을 정점으로 구축된 관료체제로 정치가 운영되어, 그 체제 아래서 양반은 왕정(王政)을 보필하는 충실한 관료 이상의 역할이 부여되지 않았다. 양반이 정치의 주도세력으로 대두하는 것은 사림의 집권과 더불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성리학이 수용되는 16세기에 이르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