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으키지는 못하였으나, 많은 지식인에게 전통적인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또 조선 후기의 개화사상(開化思想)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과정, 그리고 그들이 받았던 박해와 그 영향들을 살펴보자.
2. 서학(천주교)의 수용
천주교와 접하게 되고 한역서학서인 천주교서를 대할 수 있었다.
이런 만남은 17세기 초부터의 일이며, 그들의 손에 의해 한역천주교서가 조용하게 조선으로 계속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받아들임이 1세기 이상이나 지속되는 가운데 국내의 선각적 지식인들은 이렇게 조선 후기 사회로 도입된 한
서학 배후에 있던 서양 세력과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의 '서학'이라고 하면 넓은 의미에서는 서양 문물에 관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의미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새로운 종교로서의 천주교를 뜻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많은 사람이 접하였던 천주교와 과학 기술은
의하여 신봉되었으나, 차차 재야의 양반․중인․상인,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압박을 받던 부녀자 층에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어 갔다. 그런데 카톨릭교는 그 의식 및 교리가 조선시대 지배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던 유교와 상반되는 점이 많으므로, 사이비교로 인정되어 1786년(정조 10)이래 계
천주교 신앙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초기 교회의 신도들은 조정의 탄압을 각오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 갔고 신심 생활을 계속해갔고 창서 직후부터 일반 민중을 위하여 한글 교리서를 번역하여 보급했다. 또, 당시 신자들은 박해시대의 교회에서는 순교자들의 기록으로 용기를 길렀다. 「성녀